
수년 전 로마에서 사나흘 묵은 적이 있다. 로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다. 인도의 유럽 버전 같다. 성과 속이 자연스레 어울려 잘도 돌아가는데 보다 우아하다. 로마가 예루살렘처럼 가톨릭 성지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스타벅스가 못 들어오는 것도 통쾌하다. 에스프레스 한잔이 1유로 정도니 어떻게 경쟁을 한단 말인가? 당분간 이태리에서 사이렌 로고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근데 왜 뜬금없이 로마 이야기를 하냐고? 독특한 경험담이 있기 때문이다.
로마 근교에 있는 아씨시를 가려고 레지오날레를 탔다. 레지오날레는 시골 간이역마다 서는 이태리 완행 열차다. 우리로 치면 비둘기호 같은 거다. 내부는 좌석 두 개가 나란히 붙고 그 두 개가 또 다른 두 개와 마주보는 식으로 네 개 좌석이 한 세트다. 마침 내 옆 좌석은 비고 맞은편 좌석에는 운 좋게도 아름다운 남자 둘이 앉았다. 남자가 아름답다니 무슨 말인가? 매너가 좋다는 말이다. 로마 남자들은 대체로 동그란 머리통과 다부진 체격에, 무엇보다 옷을 기가 막히게 잘 입는다. 대화 매너는 얼마나 근사한지, 조용하고 차분한 말투로 사근사근 대화한다. 이태리 사람 기질이 격하다는 것은 여자와 마피아를 두고 하는 소리일 거다! 아 축구 선수도 있구나!
내 맞은편의 둘은 친구인 듯 나지막한 음성으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눈다. 조심스레 흘러나오는 웃음은 영문을 모르는 사람도 미소 짓게 한다. 평소에도 이태리어를 노래 같다고 여겨온 나는 이들의 대화를 모자르트의 음악처럼 들으며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푸르른 초원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아름다운 대화가 주는 감동이 말도 못하게 흐뭇하고 쾌적하다.
갑자기 한 남자가 맞은편의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다. 당황한 나는 이태리어를 전혀 못한다고 영어로 대꾸하며 속으로는 아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개탄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아직 내 편! 아까 그 남자가 다시 이태리어로 묻는다. 어디 가냐고 하는 것 같다. 아씨시라 짧게 답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중구난방의 대화를 헤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했다. 그들은 이태리어로 나는 영어로. 아 이런 일이 정말 있구나, 내가 링구아 프랑카를 직접 경험하다니!
링구아 프랑카 (Lingua Franca)는 17세기 후반 유럽과 중동의 상인들이 지중해에 몰려와 소통하던 상인의 언어다. 모국어로는 도저히 소통이 안 되니 각국 출신의 상인들이 이태리어, 프랑스어, 아랍어, 터키어 등을 다 섞어 제3의 언어를 하나 만들고 자기들끼리 장사할 때 썼다. 사람이 언어로만 대화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대화는 숨은 뜻을 잽싸게 파악하는 눈치가 반이 넘고 말로는 그저 진위 여부만 확인하는 것 같다. 상인끼리의 대화니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를 것인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자기들 모국어를 눈치와 몸짓으로 이해하고 비슷한 언어는 한데 묶어 제3의 공통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시대 링구아 프랑카는 누가 뭐래도 영어다. 그럼 그때 내가 로마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 두 남자는 영어로 대화를 했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태리어로 나는 영어로 말했다. 근데 왜 링구아 프랑카인가? 영어와 이태리어가 공통어가 많기 때문이다. 즉 그들도 이태리어로만 소통한 것은 아니고 나의 영어를 자기 식의 영어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어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가능하다. 유럽의 다른 언어보다 이태리어가 영어랑 가장 유사하다. 가령, 레지오날레는 regional이고 스따지오네는 station, 에스프레소는 express로 내린 커피 등 잘 따지고 들어가면 대략 비슷하게 많아 얼추 이해했을 것이다.
영어는 이태리어와도 비슷하지만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와도 비슷하다. 인도 유럽 어족의 분파인 로망스어에서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가 나왔고 로망스어와 영어는 라틴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마치 한국어과 중국어와 일본어가 한자 문화권으로 묶여 있어 말은 달라도 문자 언어는 쉽게 이해하는 것과 같다. 영어 하나만 잘 해도 웬만한 언어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이 하고 싶어 이런 사례를 들었지만 사실 다른 언어까지 갈 것도 없다.
호주 오픈의 수퍼스타인 정현 선수는 멋진 유머를 곁들인 영어 인터뷰로 단번에 세계의 주목을 이끌어 냈다. 그가 한국말 인터뷰를 했다면 그의 진면목을 세상이 다 알 수 있었을까? 그저 테니스를 잘 치는 아시아 선수 중 일인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정현 선수의 영어 인터뷰는 손쉽게 ‘정현’이란 브랜드를 세계무대에 대놓고 마케팅한 거나 마찬가지다. 호주 오픈을 시청한 전 세계가 그의 인상적인 온코트 인터뷰를 기억할 테니까. 그의 인터뷰 동영상이 비영어권 선수의 인터뷰 모범 교본이 되었다는 기사마저 나왔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참말로 유익하다는 것을 한방에 보여준 사례다.
나는 정현 선수를 다른 각도로 높이 평가한다. 모든 성공에는 철저한 준비가 숨어 있다. 그는 ‘테니스 수퍼스타’ 라는 큰 꿈을 꾸며 준비했다. 그가 인터뷰만을 위해 영어를 공부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온코트 인터뷰만큼 자신을 알릴 기회도 없으니 인터뷰 준비는 큰 과제였을 거다. 3년 전부터 영어 독선생을 구해 영어를 따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 독선생도 정말 잘 만났다.
따분한 단어 암기보다 현지 투어를 같이 하며 각 나라의 음식과 문화 등의 배경지식을 영어로 설명하고 영어로 질문하도록 했다. 이 단계가 익숙해지자 미국 드라마의 멋진 표현만 골라 가르치며 일상 영어가 몸에 붙도록 했고 그런 다음에야 인터뷰를 준비시켰다. 차근차근 단계별로 가르쳐 기어코 멋진 수사를 구사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런 세심한 계획에 따라 정현 선수는 테니스를 연습하듯 매일 영어를 연습했다. 마침내 자신의 우상이던 노박 조코비치를 누르고 8강 진출을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련된 영어로 소감을 쏟아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혜안과 노력에 다시금 감탄한다.
영어공부는 이렇게 앞날을 내다보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영어는 사교육의 폐해니, 절대평가니, 4등급도 서울대를 갔니 하며 몹시 탁한 혼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구글 번역기나 번역 앱도 많은데 도대체 왜 영어를 배우냐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일찌감치 영어를 포기한 쪽에 가깝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다이아몬드를 소장하는 게 좋은지 보석상에서 구경만 하는 게 좋은지를. 이런 때일수록 시류에 흔들리지 말고 왜 영어를 공부하는지부터 분명히 알아야겠다. 우리는 내신이나 수능을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정현 선수가 선방한 호주 오픈에 빗대자면 내신은 그가 거친 64강일쯤 되고 수능은 32강 정도일 뿐이다.
링구아 프랑카를 공부하는 목표가 고작 32강 진출이 되어서야 되겠나? 진검승부는 최종결승이고 세계무대다. 세계무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꿈을 크게 가지고 깊고 넓게 영어를 공부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정현 선수처럼 미래를 내다보며 본인의 꿈과 영어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지 미리 점쳐보는 것도 좋겠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고 영어 역량에 따라 활동무대가 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뛰어난 영어 역량을 갖춘 우리 아이들이 언어 장벽 없는 세상에서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며 삶의 숨은 뜻을 신나게 채굴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세계인과 한바탕 승부를 겨루며 세계무대에 우뚝 서는 코스모폴리탄이 되면 좋겠다.
